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식량을 지배하는 자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석유를 지배하는 자는 한 대륙을 지배하고, 통화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남긴 말이다.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휩쓸던 1974년 6월 8일 키신저 장관은 중동을 방문해 사우디와 '경제협력 합동위원회' 설립에 대한 협약서에 서명했다.
협약서의 핵심은 석유 거래를 미국 달러로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해 12월 미국 재무부는 사우디금융청(SAMA)과 또 다른 협약을 맺었다.
SAMA는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미 달러를 만기 1년 이상의 미 국채를 구입하는 데 쓰고,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 국방물자와 군사적 안보를 제공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국제통화였던 마르크화나 엔화, 프랑화는 석유시장에서 퇴출되고 오직 미 달러만이 석유를 사고 파는 통화의 자리를 차지했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가 되는 결정적인 무기를 얻게 된 것이다.
금본위제 폐지와 함께 도입된 이른바 페트로달러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자신의 트루스소셜 계정을 통해 “브릭스 국가들이 달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미국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면서 “새로운 자체 통화든, 기존 통화든 브릭스가 달러 패권에 도전하면 100%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트럼프는 “강력한 미국 달러를 대체할 다른 통화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0% 관세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훌륭한 미국 경제와 작별을 고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른 '빨대'(Sucker)를 찾으면 될 것”이라면서 “브릭스 국가가 국제 무역에서 미국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은 없으며, 이를 시도하는 모든 국가는 미국에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발언은 주요국들을 상대로 화폐전쟁을 벌이겠다는 선전 포고에 다름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100% 관세위협이 등장할만큼 달러패권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당장 미국이 달러를 무기화한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페트로달러에 기반한 달러패권 시대, 과연 저물었나
그런데 달러패권에 도전하는 선봉국은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브릭스 국가들이 아니었다.
페트로달러 구축을 통해 달러패권 시대가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달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먼저 일어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자리잡는데는 석유거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이야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석유 자체가 죄악시되고 있지만 인류는 산업혁명 이래 석유자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계기가 된 데는 당시 미국 정부의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 금지조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우디는 지난 6월 9일 50년간 유지해온 미국과의 석유 달러 협정 종료를 공식화했다. 키신저와 맺었던 협정을 끝낸 것이다.
이번 결정으로 사우디는 앞으로 석유 거래에서 달러 외에 위안화·유로화·엔화 등 다양한 통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사우디 산업광물자원부 장관인 반다르 알 코라예프는 한발 더 나아가 지난 10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인터뷰에서 “사우디가 중국과의 원유 대금 결제에서 위안화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는 사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사우디의 반체제 인사 자말 카슈끄지 사건 이후 이의 책임을 두고 파국 직전으로 들어가면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키신저가 페트로달러 시대를 열면서 사우디에 약속한 안보공약은 갈수록 믿을 수 없는 공수표가 되는 분위기를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우디가 우리나라 방산업체인 한화의 ‘천무’ 수입에 나서는 등 자체 무장강화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팍스아메리카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산유부국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는 위안화의 거센 도전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20년 7월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상하이국제에너지거래소(INE)에서 중국에 이라크산 원유 300만 배럴을 납품하며 위안화로 거래한 적이 있다.
중국이 2018년 원유선물시장을 연 뒤 석유 메이저 회사가 위안화로 원유를 처음 거래하자 원유시장에서는 '페트로달러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당장 나왔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다고 해서 페트로달러 시대가 완전히 저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달러패권을 흔들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달러 패권 움직임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
미국 국채를 팔아치우던 사우디가 트럼프의 재기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미 국채에 올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 중앙은행이 지난해 4분기부터 미국 국채를 사들이기 시작해 지난 10월 말 기준 보유액이 1439억달러까지 늘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수치는 4년 만에 가장 많은 수준이다. 사우디 중앙은행이 보유한 총 외환보유액 가운데 미국 국채 비중은 35%에 달해 2020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사우디의 국채 증가는 11월 미국 대선 전에 이뤄졌지만, 이는 향후 트럼프 차기 행정부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빈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 당선인과는 비교적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국제분쟁 종식해야 트럼프의 비트코인 전략자산화 통한 달러패권 유지에 도움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세계 외환거래에서 미국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88%에 달해 압도적이다. 가히 달러패권 시대라 할만 하다.
하지만 세계 중앙은행들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을 낮추고 있음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00년 70%를 넘겼던 각국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의 달러 비중은 지난해 58%까지 떨어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같은 움직임은 미국과 대척점에 서있는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먼저 전개되고 있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위기가 고조되던 2021년 11월 화상 정상회담에서 “제3자(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노력을 가속화하겠다”며 달러 거래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공유했다.
이후 루블화와 위안화를 통한 양국간 거래는 100배 가까이 늘어 위안화 기준으로 2000억 위안을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인도간의 거래도 주목해야 한다.
인도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 제재를 피해 아랍에미리트(UAE) 디르함화와 러시아 루블화를 통해 러시아 원유를 거래하고 있다는게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되고 있다.
인도는 뿐만 아니라 자국 화폐인 루피화의 국제화도 적극 나서 지난해에는 인도석유공사(IOCL)를 통해 아부다비국영석유공사(ADNOC)로부터 1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면서 대금을 인도 루피화로 결제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러시아 연방 카잔에서 열린 제16차 브릭스 정상 회담에서 발표된 카잔 선언문에는 ‘브릭스 은행’이라 불리는 신개발은행(NDB)을 21세기의 새로운 다자주의 개발은행으로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달러 패권주의의 탈피를 모색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당선인의 가상화폐에 대한 전략의 숨은 뜻을 읽을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이전인 지난 7월 이뤄진 ‘비트코인 2024’ 콘퍼런스에서 비트코인을 ‘국가 전략 비축 자산(Strategic National Bitcoin Stockpile·)'으로 보유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비트코인이 전략자산이 된다면 달러 같은 기축통화나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금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공화당 신시아 루미스 의원은 미 연방준비제도가 5년에 걸쳐 매년 20만개씩 비트코인 100만개를 매입하도록 하는 법안을 이미 발의한 상태다. 이는 비트코인 전체 공급량 2100만개의 4.8%에 해당한다.
루미스 의원은 “1970년대 금 비축분 일부를 매각해 비트코인을 매수해야 한다”며 “정부의 비트코인 비축이 미국이 세계의 기축 통화로서 달러를 지탱하고 부채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 분위기가 가상화폐에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 가상화폐 산업 비영리단체인 스탠드위드크립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상·하원의원으로 선출된 421명의 당선자 중 287명이 가상화폐 시장 친화적인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이같은 분위기를 등에 업고 결국 ‘페트로달러 시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가상화폐를 대체재로 삼아 다시 한번 달러패권 시대를 강화하는 무기로 삼을 계획인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돈나무 언니'로 잘 알려진 투자회사 ARK인베스트먼트의 캐시 우드는 2030년까지 비트코인이 최대 150만 달러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2기가 비트코인을 달러패권의 우군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비트코인이 달러패권의 우군이 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페트로 달러’가 아니라 ‘비트코인 달러’가 달러패권의 절대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근거는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달러는 결국 페트로 달러가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 달러패권의 우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미국 국채를 다시 사들이면서 트럼프 2기 정부와 밀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사우디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고립주의 원칙을 내세우는 트럼프의 정책이 본격화되면 힘을 비축한 국가들은 결국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될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100% 관세폭탄을 외쳐도 ‘달러패권 시대’는 저물어가는 추세를 뒤집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많다.
결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달러패권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석유시장에서 ‘페트로달러’를 계속 유지함은 물론 각국 분쟁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비트코인은 단지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취임과 함께 끝내고 중동 분쟁도 휴전협정으로 마무리하려는 트럼프 당선인의 시도가 성공해야 ‘달러 패권’은 유지될 것이다. 100% 관세협박이나 비트코인의 전략자산화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달러 이외의 지불수단을 찾게되고 중동분쟁이 격화되고 중동 국가들의 내정에 관여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때문에 사우디 등 부국이 달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