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 E&S 21~23년 발행한 RCPS 3.1조원...'독소조항' 수두룩
- 합병 선행조건 'RCPS 소멸'
- 합병 실패할 경우, RCPS 재정적 부담 작용 전망
[편집자주] 기업의 위험징후를 사전에 알아내거나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용이 어렵거나 충분하지 않다면 호재와 악재를 구분하기 조차 어렵다. 일부 뉴스는 숫자에 매몰돼 분칠되며 시장 정보를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할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치다. ‘현미경’ 코너는 기업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특정 동선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되짚어 본다.
뉴스웨이브 = 이태희 기자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을 발표하며 3.1조 원 규모의 무의결권부상환전환우선주식(RCPS) 소멸을 합병 조건으로 내걸었다.
RCPS 소멸을 위해 SK E&S는 자산 매각 또는 현물 상환을 검토 중이며, 7개 도시가스 자회사들이 매각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합병이 실패할 경우 RCPS는 더 큰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해결 방안이 주목된다.
지난 17일 SK그룹은 주력사 중 하나인 SK이노베이션과 민자발전 및 도시가스 전문 비상장 계열사인 SK E&S를 오는 11월까지 합병하겠다고 발표했다.
계속 적자에 허덕이는 자회사 SK온 때문에 같이 고전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에 우량 계열사 이엔에스를 합병시켜 두 회사를 살려보자는 취지다.
그러면서 양사는 합병의 선행조건 한 개를 따로 공시했다. SK이엔에스가 발행한 RCPS 534만4293주를 합병 완료 전까지 소멸시킨다는 내용이었다. 11월까지 이 RCPS가 소멸되지 않으면 합병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 RCPS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석달여 밖에 남지않은 시간에 서둘러 모두 소멸시킨다는 것일까?
RCPS는 일정 기한이 지나면 발행 회사가 발행 원리금을 조기 상환, 주식을 다시 소멸시킬수 있지만 주식 보유자에게도 의결권이 있는 보통주 전환을 요구할 권리를 같이 주는 주식이다. 우선주여서 매년 배당도 보통주보다 많이 준다.
주식 보유자에게 상환 요구권이 없어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자본과 부채비율도 관리하고 필요 자금도 조달하려는 기업들이 쓰는 자금조달 방법 중 하나다.
SK E&S는 2021년 11월 글로벌 사모펀드 KKR을 상대로 RCPS 409만4293주를 2.4조원에 발행했다. 조기상환은 5년 후인 2026년 11월부터 가능하고, 보통주 전환가액은 주당 29만3091원으로 정했다. 전환비율은 1대2로, 우선주 1주로 보통주 2주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년 후인 지난해 1월과 10월에도 KKR을 상대로 각각 62.6만주(3675억원)씩의 RCPS를 또 발행했다. 상환조건이나 전환비율은 2021년 발행분과 똑같았고, 전환가액만 29만4000원씩으로 약간 상향조정됐다. 이렇게 확보한 RCPS들을 KKR이 5년 후 모두 보통주로 전환할 경우 KKR의 SK E&S 보통주 지분율이 18.7%에 달할 수 있는 물량이다.
SK E&S는 이 세 차례 발행으로 3조135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발행 조건이 대그룹 계열사 발행분 치고는 가혹해 보인다는 게 당시에도 문제가 됐다.
이 우선주들은 비참가적, 누적적 조건으로 발행되었고, 발행가액에 연율 3.99%의 우선배당을 받도록 되어 있다. 지금도 연간 1250억원의 배당금을 이엔에스가 KKR에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다.
SK E&S 과거 공시에 따르면 5년 후 조기상환 시 상환가격은 투자자의 내부수익률(IRR)이 21년 발행분은 7.5%, 23년 발행분은 9.5%가 되는 금액이다.
발행 후 5년이 지났을 때 조기상환을 한다고 가정해 대충 계산해보면 KKR이 받게 될 투자회수액은 4조원 가량 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때까지 이미 받은 우선배당까지 감안하면 총 투자회수액은 4조6000억원 가량 된다.
지난 3월 말 현재 SK E&S의 연결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모두 3조2124억원에 달하지만 별도기준으로는 6181억원에 그친다. 조기상환 자금을 마련하려면 SK E&S의 발전 및 도시가스 자회사들 현금을 모두 박박 긁어모아도 가능할까 말까다. 실제 그렇게 하긴 어렵다.
만약 SK E&S가 조기상환을 하지 않으면 더 가혹한 벌칙(?)이 따른다. KKR은 조기상환 시점이 되더라도 특정 기준가치보다 주가가 낮다면 전환청구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 기준가치는 KKR의 내부수익률이 17.5%가 되는 금액으로 계약되어 있다.
대충 계산해보면 주당 67만원 정도다. 아무리 SK E&S가 안정적인 발전-도시가스회사라 하더라도 현 상태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주가다. 주가가 이보다 높아지지 않으면 KKR은 전환청구를 안해도 되고, 대신 우선주 배당률만 더 높아지게 되어 있다.
기존의 3.99%에서 8.99%로 크게 높아지고, 여기에다 보통주에 배당이 있을 경우 보통주식으로 환산한 지분율 만큼 배당을 더 받을 수 있는 참가적 우선주로 바뀐다. KKR에 대한 우선주 배당이 지금보다 2배 이상 대폭 늘어나는 구조다.
쉽게 말해 2년 후인 2026년 11월 이후부터는 조기 상환시점을 늦출수록 배당 부담과 상환 부담이 계속 크게 늘어나는 구조다. 사실상 조기상환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설계된 RCPS라고 발행 당시부터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런 RCPS와 독소 조항을 그대로 두고 양사가 합병을 강행한다면 아무래도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 뻔하다. 자기 회사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상장기업인 SK이노베이션 현 주주들이 이를 반길 리가 없다. 그대로 두고 합병을 강행했다가는 SK이노베이션 주주들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높다.
자본이라지만 사실상 부채 성격이 강한 이 RCPS를 그냥 두고 양사 합병비율을 섣불리 산정했다간 거센 부당 합병비율 산정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도 높다.
반면 SK온은 흑자전환이 계속 연기되면서 돈은 돈대로 계속 들어가고, 이 때문에 SK이노베이션까지 국제신용등급 강등조치를 당해 이들에 대한 구제조치를 미루기도 어렵다. 구제방안으로 우량 계열사 SK E&S와의 합병만한 카드를 달리 찾기도 어려웠다는 게 IB업계의 분석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 감안해 SK측은 이번 합병을 강행하면서 합병 완료 전까지 RCPS를 소멸시키고, 합병비율 산정 과정에서도 SK E&S의 순자산에 이 RCPS를 아예 빼기로 한 것이다. 논란거리를 아예 원천 배제했다.
RCPS 만큼 순자산을 줄이려면 SK E&S의 자산도 그만큼 제외시켜야 하는데, SK E&S측은 그 대상으로 SK E&S가 지분 100%를 보유한 도시가스사업 관련 자회사 7곳을 이미 정해둔 것으로 알려진다.
강원도시가스, 영남에너지서비스, 코원에너지서비스, 부산도시가스, 전북에너지서비스, 전남도시가스, 충청에너지서비스 등이다.
RCPS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 7개 도시가스 계열사들을 KKR에 넘겨줄 준비는 다 되어 있다는 얘기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는 최근 합병관련 공시에서 “(RCPS 소멸을 위해) 합병완료 전까지 유상감자, 상환, 기타 여러 방안을 검토 중이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며 "구체적인 방안을 최대한 신속히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중 유상감자와 상환은 KKR측에 현찰을 주고 해결하면 가장 간단하다. 그러나 양 사는 물론 SK그룹 어느 곳에서도 11월 전까지 4조원 이상 현찰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인다. 2026년 이후 기대수익까지 생각하고 있을 KKR은 요구금액을 훨씬 높여 부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들은 SK측이 7개 도시가스 사업회사들을 KKR에 현물로 넘기는 현물 상환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를 이미 내놓고 있다.
SK E&S 도시가스사업부의 작년 매출(연결)은 5조1892억원으로, 전체 매출의 46% 가량을 차지했다. 7개사가 올린 작년 당기순이익은 5480억원으로, 전체 당기순익 1조863억원의 50.4%에 달했다. 회사 이익창출력의 정확히 절반에 달하는 핵심사업부다.
7개사를 빼고 합병한다면 당초 기대했던 합병 실익의 절반 정도만 확보 가능하다는 얘기다.
캐시카우 중 캐시카우인 도시가스 계열사들을 내주면 합병 취지가 퇴색하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 이들 7개사는 전국적인 공급권역을 확보하고 있고, 시장점유율도 22.7%로 국내 1위다.
이런 문제들을 감안,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과 동시에 다른 합병카드도 같이 발표했다. 7개 도시가스회사들 못지 않게 이익창출력이 있는 비상장 계열사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을 SK온에 흡수합병시키는 것이다.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의 작년 연결 당기순익은 5462억원에 달했다. 두 회사를 합치면 얼추 7개 도시가스사 이익 규모와 비슷하다고 한다. 7개사를 매각 또는 현물 상환한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이 합병을 같이 기획했다고도 볼 수 있다.
SK E&S의 RCPS만 없었다면 SK이노베이션과 SK온 살리기에 SK E&S 한 회사만 동원하면 충분했을텐데, 알짜 계열사 2개를 더 동원한 셈이 된다. 여기에다 진짜 알짜 도시가스 7개사까지 넘어간다.
SK그룹은 SK E&S 말고도 SK11번가와 SK스퀘어 RCPS 때문에 작년에 큰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5년 후 조기상환을 한다는 사실상 묵계하에 국민연금 등 투자자들의 투자를 받은 것인데, 11번가가 과거 RCPS로 조달한 자금 5000억원의 콜옵션(조기상환) 행사를 모기업인 SK스퀘어가 하지 않아 생긴 사태였다.
물론 SK스퀘어 측에서도 할 말은 많겠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시장 전체에서 SK그룹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된 사건이었다. SK의 RCPS는 확실히 여러 문제가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RCPS는 재무상태가 안정된 기업이라면 잘 거들떠 보지 않는 일종의 변칙 자금 조달 수단이다. 2020년만 제외하고 2019년 이후 매년 5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려온 SK E&S도 원래는 이런 RCPS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회사 자체 투자 수요에다 특히 SK E&S 지분 90%를 보유한 모기업 SK에 대한 대규모 배당이 문제였다. 지주사 SK에 지급한 배당 규모를 보면 2018년 2377억원에 그쳤던 것이 19년에는 6043억원, 20년에는 무려 1조1113억원으로 커졌다.
2021년(1350억원)부터는 다시 크게 줄었지만 2019, 20년 두 해는 벌어들인 순이익 이상을 모두 지주사에 배당으로 갖다 바쳤다. 이 때는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파이낸셜 스토리’란 이름으로, SK그룹 전 계열사가 맹렬히 신사업과 투자확대 퍼레이드를 활발히 벌이기 시작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룹의 금고 역할을 너무 과중하게 하다보니 현금이 넘치던 회사가 졸지에 영업활동 현금흐름 적자 회사로 바뀌었다. 현찰 부족으로 차입금도 크게 늘었다. 여전히 장부상 당기순익은 큰 흑자였지만 국내외 주요 신용평가사들은 “배당금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며 SK E&S 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
이듬해인 2021년 1차로 2.4조원에 달하는 RCPS를 부랴부랴 발행한 것은 자본력을 크게 보강해 신용등급이라도 우선 회복하자는게 목적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렇게 부작용이 많은 가혹한 발행조건들까지 감수하면서 무려 3.1조원치나 발행할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당연히 남는다. SK E&S의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21년 7241억원으로 크게 늘었고, 22년과 23년 영업이익도 각각 1조7110억원, 1조3317억원으로 더 크게 늘어났다.
21년부터 배당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자체 투자와 차입금 축소에 RCPS를 굳이 3.1조원까지 발행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SK E&S 자체 판단이 아니라 그룹의 주도 또는 강요로 발행규모를 크게 늘리고 무리한 발행조건들까지 감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행을 주도한 측은 2026년 이전까지 SK E&S를 상장(IPO)시키면 3.1조원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 SK E&S 재무상태 등으로 볼 때 지금도 상장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불과 9개월 전인 작년 10월에도 3차분 RCPS를 발행한 것을 보면 상장카드는 그때까지도 유효했다.
그러나 9개월 후 이 카드는 사라지고, SK이노베이션과의 합병카드로 갑자기 바뀌었다. 알짜 3개사까지 동원되고, 진짜 알짜 7개 도시가스사들은 팔려나갈 상황까지 갔다.
물론 더 큰 목적의 M&A(인수합병)를 하다보면 희생물이 때에 따라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것이 정교한 기획과 계산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무차별 난사(?)의 결과물인지의 차이는 크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들도 심각한 부작용들까지 충분히 내다보지 못하고 파이낸셜스토리 경쟁을 너무 과도하게 펼치다보니 생긴 일들 중 하나”라면서 “그렇게 요란했던 투자경쟁의 결과 지금까지 성공이라고 판단되는게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메모리)이나 솔리다임 말고 또 뭐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은 연속된 초대형 M&A로 짜릿한 대성공의 역사를 만들어온 대표적 대그룹이다. 유공(현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이 대표적 사례고, 2011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하이닉스를 최태원 회장이 결단해 과감히 인수한 것은 최대의 쾌거였다.
올해부터 삼성전자를 크게 긴장시키며 하이닉스의 화려한 부활을 주도하고 있는 HBM이나 솔리다임(옛 인텔 낸드사업부)도 SK다운 뚝심과 베팅의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취감에 지나치게 도취해 최근 수년간 너무 일을 벌인 결과 RCPS같은 심각한 부산물들까지 토해내고 있다.
IB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SK 지도부가 정교성까지 갖춘다면 더 말할 필요없는 금상첨화”라고도 말했다. 과감한 결단과 절묘한 베팅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정교성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지적이다.
한편 KKR과의 RCPS 협상은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합병 발표 전에 양측이 이미 중요한 원칙에 대충 합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 타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
KKR 입장에선 2년 후면 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는데, 2년이나 앞당겨 조기상환을 받는다면 더 가혹한 조건을 추가로 내걸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갑’은 KKR일 것이다.
SK 측이 어떤 묘수를 내놓을지는 협상 결과를 더 지켜볼 도리 밖에 없다. 11월 전에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혹시라도 타결이 안되면 합병 자체가 무산이 된다. 진짜 무산이라도 된다면 RCPS는 더 큰 폭탄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