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금·대출·자산이 지난 1년 6개월 간 절반 가까이 감소
- 타 저축은행 대비 감소폭 커
- 부실 대출 증가와 고금리 부담 등이 원인으로 지목
[편집자주] 기업의 위험징후를 사전에 알아내거나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용이 어렵거나 충분하지 않다면 호재와 악재를 구분하기 조차 어렵다. 일부 뉴스는 숫자에 매몰돼 분칠되며 시장 정보를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할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치다. ‘현미경’ 코너는 기업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특정 동선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되짚어 본다.
뉴스웨이브 = 이태희 기자
저축은행업계 7위 대형 저축은행인 페퍼저축은행의 예금과 대출, 자산이 작년 이후 올 상반기까지 1년6개월 동안 절반 가량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올 상반기 감소율도 예금과 자산은 30%대, 대출은 20%대에 각각 달한다.
작년 이후 다른 상당수 저축은행들도 예금이나 대출, 자산이 대체로 감소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페퍼저축은행처럼 큰 감소 폭을 보이는 곳은 없다. 저축은행사태나 금융위기 때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 멀쩡히 정상 영업 중인 대형 저축은행에서 나타난 것이다.
24일 저축은행중앙회 공시포털에 따르면 평잔(평균잔액) 기준 페퍼저축은행의 올 상반기 예수부채(예금)는 3조2857억원으로, 작년 상반기 5조5056억원에 비해 1년 동안 무려 40.3%(2조2199억원)나 격감했다.
말잔(기말 잔액) 기준으로 따져도 지난 6월 말 2조8458억원, 작년 말 4조1715억원, 2022년 말 5조5554억원으로, 올 상반기 동안에는 31.7%, 작년 이후 1년6개월 동안에는 48.7%나 각각 줄어 들었다.
대출도 비슷하다. 평잔 기준 올 상반기 대출채권은 3조2252억원으로, 작년 상반기 5조3323억원보다 2조1071억원, 39.5% 감소했다. 말잔 기준으로는 올 상반기에 23.4%, 지난 1년6개월 동안은 50.8%나 각각 줄었다.
전체 자산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출이 이처럼 줄자 자산도 당연히 크게 줄 수 밖에 없다. 지난 6월 말 자산은 3조2724억원으로, 1년 전의 6조3861억원에 비해 48.7%나 감소했다. 올 상반기 감소율은 30.7%, 작년 이후 1년6개월 감소율은 47.7%다.
자산 기준 10대 대형 저축은행들의 지난 1년6개월 자산 감소율을 보면 자산 기준 1위 SBI저축은행이 15.3%, 2위 OK저축은행 4.78%, 3위 한국투자저축은행 1.69%, 4위 웰컴저축은행 20.5%, 5위 애큐온저축은행 14.2%, 6위 다올저축은행 8.1%, 8위 하나저축은행 2.5%, 9위 상상인저축은행 26.8%, 10위 KB저축은행 18%다.
웰컴과 상상인이 20%대 감소율을 보였을 뿐 페퍼처럼 50%에 육박하는 감소율을 보인 곳은 없었다. 11대 이하 나머지 저축은행들에서도 마찬가지다. 10대 저축은행들 중 한국투자, 다올, 하나저축은행 등은 올 상반기에 자산이 소폭이지만 증가세로 돌아섰다.
저축은행들 중에서도 유독 페퍼의 예금과 대출 감소 폭이 이처럼 큰 이유를 놓고서는 여러 해석이 나돌고 있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다른 많은 저축은행들처럼 페퍼도 저축은행 예금금리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저축은행의 불안한 상황 등 때문에 빚어지는 예금 이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그 외에도 지나치게 높은 조달금리 때문에 생기는 인위적인 예금 축소, 부실대출 축소를 위한 인위적인 대출 축소 등의 여러 복합요인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저축은행들도 대개 비슷하다. 페퍼만 유독 감소세가 큰 이유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이 때문에 일부 금융계 관계자들은 전세계적인 고금리 전환 직전인 2022년까지 페퍼가 보여준 유별난 초고속 성장세에 그 해답이 있는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페퍼저축은행은 호주 페퍼그룹을 거쳐 현재 글로벌 대형 사모펀드인 KKR그룹이 최대주주인 저축은행이다. 2013년 저축은행사태로 부실화된 국내 저축은행 2개를 인수하면서 한국에 진출한 이후 2022년 말까지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 공로로, 한국계 미국이민 1.5세대인 매튜 하돈 장(한국명 장하돈)대표는 첫 한국 진출 때부터 11년째 계속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 진출 직후인 2015년 말 6990억원이던 페퍼저축은행의 자산 총액은 2016년 말 1조3064억원으로 갑자기 2배 가까이 점프했다. 이후 2017년 말 1조7125억원, 18년 말 2조4031억원, 19년 말 3조3169억원, 20년 말 4조3198억원, 21년 말 6조186억원, 22년 말 6조2554억원 등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지속했다.
한국 진출 9년 만에 자산은 무려 21배 이상 폭증했다. 소형 저축은행에서 한때 자산 기준 저축은행업계 3위까지 뛰어 올랐다. 작년 6위로 떨어진 후 지난 6월말 기준으로도 여전히 7위자리는 지키고 있다.
페퍼의 이같은 폭발적 성장을 두고, 한때 ‘문재인 정권 특혜설’이 나돌기도 했다. 문재인 정권 집권 기간에 유별난 자산 증가세를 보였고, 또 장 대표가 문재인 정부 장하성 정책실장과 친척 관계라고 소문나면서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고, 또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아무리 청와대 정책실장이더라도 한 저축은행의 예금과 대출을 이같이 폭발적으로 늘려줄 방법은 찾기 어렵고, 제 정신이라면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장 대표 특유의 세일즈 능력 때문으로 당시 업계는 평가했다.
올해 57세인 장 대표는 10세 무렵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1.5'세대로 알려져 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프라이빗뱅킹, 신용카드 세일즈 등 컨슈머뱅킹 부문에서 경력을 주로 쌓았다고 한다.
한국으로 유턴한 건 2002년.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한국소매금융 대표를 역임한 그는 PB본부장, 지점총괄상무 등 리테일 분야에서 업계 대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당시로는 생소했던 데이터분석을 활용한 직장인 신용대출 모델을 국내시장에 안착시키며 세일즈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신용자 위주의 제1금융권, 저신용자 대상의 저축은행이란 공식을 깨고 페퍼저축은행이 중금리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데도 장 대표의 이력이 한 몫 했다.
‘데이터분석’과 ‘첨단과학경영’을 앞세우면서 영업방식도 다른 저축은행들과 좀 달랐다. 저금리시대 때 대부분의 저축은행들이 부실만 안생기면 고수익이 보장되는 부동산PF대출 등 부동산관련 대출영업에 사실상 올인할 때 페퍼는 오히려 개인대출 비중을 더 늘렸다.
실제 총대출에서 부동산PF대출과 건설업 및 부동산업 대출 등 부동산관련 여신 비중을 보면 페퍼는 지난 6월 말 18.66%에 그친다. 반면 OK나 웰컴저축은행은 이 비중이 모두 26%를 넘는다. 페퍼의 경우 지난 20년 말 이 비중이 8.15%에 불과했으며 뒤늦게 늘린 것이 이 정도다.
이에 비해 페퍼의 개인대출비중은 지난 6월말 45.25%에 달한다. 2020년 말에는 이 비중이 58.86%에 이르기도 했다.
장 대표와 페퍼는 초기부터 틈새 대출시장을 적극 공략했다고 한다. 대체로 은행권이 신용등급 1~3등급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기존 저축은행이 7~9등급에 중점을 뒀다면 폐퍼는 4~6등급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데이터기반 신용평가 모델을 갖추고 차별화된 예적금, 중금리 개인신용대출을 중심으로 주택담보·사업자·소상공인·자동차 대출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제시했다. 또 업계 최초로 행동평점시스템을 도입해 고객 신용도를 면밀히 분석, 추가대출 등에 참고했다.
자체 모바일용 앱을 이용, 소액대출을 10분 이내에 빠르게 받을 수 있게 하고 수시입출금이 되면서도 연 2%금리를 제공하는 모바일 전용상품도 출시했다.
그러나 고금리 시대로 접어들고, 그 여파로 실물경기와 부동산경기가 극도의 침체에 빠지면서 페퍼의 틈새대출 영업신화는 작년부터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선 페퍼저축은행의 총대출 중 부실여신이라고 볼 수 있는 고정이하자산비율은 작년 6월 말 7.33%에서 1년 후인 지난 6월말에는 19.15로 크게 높아졌다. 10대 저축은행들 중 상상인 다음으로 부실비율이 높다.
손실위험도가중여신을 자기자본+고정이하충당금으로 구하는 손실위험도가중여신비율은 전국 79개 저축은행들 중 부산 솔브레인저축은행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40.57%(6월 말)에 달한다. 1년 전 이 비율은 23.90%였다. 손실위험도 가중치를 적용한 실질적인 부실여신비율은 이렇게 더 높다는 얘기다.
지난 6월 말 기준 부실(고정이하)여신 5424억원 중 부동산PF 등 부동산관련여신 부실은 1514억원에 불과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3910억원은 비부동산여신에서 나왔다.
페퍼 측은 ‘우리가 작년부터 상대적으로 큰 적자가 났지만 이는 소상공인이나 영세민 등 대출에서 문제가 많이 생긴 때문이지 요즘 문제가 크게 되고 있는 부동산PF대출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어 실물경기만 회복되면 회복속도가 훨씬 더 빠를 것’이라고 일부 언론에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부실여신 대부분이 소상공인이나 영세민 대출, 아니면 개인대출 부문에서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페퍼가 그동안 자랑해오던 개인대출 부문에서 큰 부실이 생겼거나 게속 생기고 있다는 얘기다.
작년부터 이처럼 부실이 급증하면서 대손상각비(대손충당금 전입액)는 작년 상반기 977억원에서 올 상반기 872억원으로 약간 줄었지만 여전히 과다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또 올 상반기 대출채권 처분이익이 93억원인 반면 대출채권처분손실은 430억원에 달했다. 급하게 부실대출채권들을 처분하다보니 많은 손실이 났다.
이 때문에 올 상반기 페퍼의 영업적자는 837억원으로, 전년동기 559억원보다 더 늘어나면서 전국 79개 저축은행들 중 최대 적자규모를 기록했다. 반기순손실 643억원도 업계 최대규모다.
이처럼 부실대출 급증과 이에 따른 부실대출채권 매각 및 상각이 전체 대출과 자산 감소의 큰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올 상반기 대출채권 감소액은 7886억원인데 비해 올 상반기 대출채권 매각과 제각은 각각 2259억원 및 106억원이었다.
나머지 5521억원은 어디서 감소한 것일까? 아직 정식으로 부실로 분류되지 않은 대출채권들도 작년과 올 상반기에 상당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대출채권을 정리하고 있는지는 페퍼의 저축은행중앙회 공시나 회계장부에 설명이 전혀 없다.
2년 전인 2022년 5월부터 금융감독원이 페퍼의 급격한 자산 증가 배경 확인 차 벌였다는 수시검사 결과와 관련이 있는게 아니냐는 추측들도 적지 않다. 당시는 윤석열 정권이 갓 출범하던 때였다.
페퍼와 장하성 관련설이 많이 나돌던 때였으므로 현 정부가 사실 확인 차 금감원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당시 일부 언론은 금감원이 수시검사에서 페퍼가 개인사업자 주택담보대출을 불법으로 취급한, 이른바 ‘불법 작업대출’을 대거 적발해냈다고도 보도했다.
‘불법 작업대출’은 그 후 페퍼뿐 아니라 다른 여러 저축은행들에서도 확인돼 금감원의 제재를 받았다. 이 불법대출을 금감원 지시에 따라 그 후 정리한 것이 전체 대출 감소의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대출이 이처럼 여러 이유로 격감하면 고금리 부담 때문에 예금도 당연히 줄일 수 밖에 없다. 예금을 받았으면 대출로 운용해야하는데, 곳곳이 부실 지뢰밭이라 운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페퍼가 부실과 적자 급증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퍼져 스스로 빠져나가는 예금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페퍼의 퇴직연금시장 철수설이 돌면서 퇴직연금 이탈이 올 상반기 예금 격감의 큰 원인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실제 페퍼는 다른 저축은행들과 달리 개인 예금자(6월말 44.77%)와 법인및단체(0.12%) 예금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고, ‘기타’로 분류된 예금자비중(55%)이 특이하게 많은 예금자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기타’에 퇴직연금 등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아무튼 원인이야 무엇이든 예금과 대출이 1년6개월 동안 절반 안팎이나 줄었다는 것은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심각한 상황이다. 소문이 확산되면 예금이탈 등이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작용이 생길 줄 뻔히 알면서도 페퍼가 예금과 대출 축소를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다급하거나 공개할 수 없는 ‘사연’들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매튜 하돈 장 신화’가 정말로 깨지는 지는 올 하반기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면 판명날 것으로 보인다.
